어린 시절의 낙서장이라는 공간은 때로는 평범한 종이 위에 펼쳐진 상상의 무대였다 느릿느릿 넘어가는 교과서의 페이지보다 더 많은 모험과 이야기가 숨어 있던 곳이 바로 작은 연습장이나 공책이었다 연필로 뒤적거리며 그려나가던 낙서들에는 저마다의 개성이 있었다 어떤 날은 지루한 수업 시간을 견디기 위해 교과서 여백에 조금씩 인물이 자라났고 또 어떤 날은 집에 돌아와 신문지나 광고지 뒷면에 멋대로 춤을 추듯 생명이 깃든 캐릭터가 탄생하기도 했다 낙서할 때는 멋지거나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어서 오히려 상상력이 마음껏 발휘되었던 것 같다 손을 바삐 움직여 선을 그어갈 때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아이디어가 용솟음쳤고 연필자국 하나가 고작이었지만 그 안에서 인물의 성격이나 세계관까지 혼자 설정해보곤 했다 그 시절의 낙서들은 서툴고 어설픈 그림이었지만 그 안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나만의 마법이 깃들어 있었다
매끈한 스케치북이 아닌 낡은 노트의 한 켠에서는 우스꽝스러운 동물형 로봇이 그려져 있었고 다른 한 페이지를 넘기면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외계행성에서 온 듯한 소녀의 모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비록 연필 선 하나를 일정하게 유지하기도 어려워 곡선이 비틀비틀거리거나 지우개 자국이 여러 겹 겹치긴 했지만 그 과정 자체가 나에게는 작은 예술 활동이었다 낙서를 하며 시간을 잊고 살다 보면 어느새 노트 수십 장이 꽉 차곤 했다 교과서나 문제집에 적힌 글자들이 주는 답답함을 멋대로 뚫고 나갈 수 있는 탈출구가 바로 낙서장 속이었다 가끔은 동네 친구들을 불러서 서로의 낙서장을 구경하며 이런저런 스토리를 덧붙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마법소녀를 그렸고 또 다른 이는 거대한 로봇과 괴수의 전투 장면을 만화처럼 이어 그렸다 그렇게 다 같이 웃으며 낙서를 즐기는 순간에는 어떤 커다란 룰이나 평가가 개입하지 않아서 더없이 즐거웠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각자에게는 대표 캐릭터 같은 것이 생기게 되었다 나의 경우에는 사람처럼 서 있는 여우와 밤하늘을 누비는 고양이 기사단을 자주 그려 넣었다 처음엔 우스꽝스러운 얼굴 정도에서 시작됐는데 점점 팔 다리가 붙고 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배경 속 환경까지 자라났다 심심찮게 수첩을 열어 만화를 만들면서 혼잣말로 대사를 구상하기도 했다 이 캐릭터들은 내가 실제로 겪지 못하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어 어디론가 훌쩍 떠나기도 하고 상상도 못할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낙서장을 쭉 펼쳐서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 캐릭터들이 모험을 하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어떤 날은 중세 기사처럼 갑옷을 입혀주었고 또 어떤 날은 우주를 누비는 비행선을 탄 채로 외계행성에 가기도 했다 현실에서는 항상 같은 교실 같은 책가방을 들고 다녔지만 마음만은 낙서 속 세계를 누비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상상력은 때로는 어른들의 눈에는 엉뚱해 보였을 수도 있다 숙제를 하다 잠시 펜을 놓고 노트 귀퉁이에 그린 낙서가 시험 범위 체크나 필기보다 훨씬 흥미로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린이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그 엉뚱함이 자유롭고 무한한 세계를 열어 주었다 딱히 미적 기준을 맞추려 노력하지 않아도 됐고 색칠 공부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도 맘껏 칠하고 싶은 색을 펼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낙서장 속 캐릭터들의 옷이나 머리색은 현실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다양했다 파란 머리에 보라색 옷을 입고 핑크빛 모자를 쓰고 다니는 등 말 그대로 제한이 없었다 그렇게 마음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간단한 줄거리를 덧붙이는 동안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재미에 푹 빠졌다
실제로 그 시절엔 주변 아이들도 저마다의 캐릭터를 은근히 만들고 있었다 학교 급식 시간이 끝나면 종이 한 장에 새로운 인물을 그린 뒤 이름을 붙여주고 그 캐릭터의 능력치를 설정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친구들끼리 서로의 캐릭터를 합작하기도 했다 나는 로봇과 동물을 잘 그렸으니 다른 친구는 배경이나 무기를 더 멋지게 그려주고 또 다른 친구는 적군 캐릭터를 만들어서 이야기를 완성하는 식이었다 그러면 간단하지만 나름의 세계관이 만들어졌고 그 속에서 우리들은 마치 공동 창작자가 된 것처럼 뿌듯함을 느꼈다 때론 서로의 그림에 지적을 하며 싸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 캐릭터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묶일 때 느껴지는 흥분감에 즐겁게 어울렸다
주말이나 방학이 되면 누군가의 집에 모여 낙서장 대회를 열기도 했다 형제자매나 사촌이 있는 집이라면 여러 명이서 시끌벅적하게 모여서 종이와 색연필을 펼쳐놓고 몇 시간을 보내곤 했다 간식을 먹다가도 문득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달려가서 그림을 그리고 게임을 하다가도 캐릭터 이름과 배경 설정을 바꿔보며 장난을 쳤다 그 시절 가장 큰 즐거움은 사실 적은 용돈이나 좁은 동네 공터에서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돈이 필요하지 않았고 장소도 특별할 필요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무궁무진하게 뻗어나오는 상상력만 있으면 종이 한 장으로도 우주를 만들 수 있었다
나중에 자라면서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이 더 깊어졌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는 동네 서점에서 소년만화를 사보거나 아침 일찍 방영하던 애니를 챙겨보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낙서장 속 캐릭터들이 점점 만화 주인공들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자주 보는 만화의 주인공처럼 칼을 든 소년 형태를 자주 그리기도 하고 아이돌 풍의 화려한 의상을 걸친 소녀 캐릭터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림체 역시 서서히 발전했고 스토리를 구상할 때도 만화의 영향을 받아 액션 장면이나 대사체가 좀 더 극적인 형태가 되었다 사실 이 시기에 비로소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하지만 엄격한 미술 교육을 받기보다는 여전히 낙서라는 자유로운 형태를 벗어나지 않은 채 자기만의 스타일을 유지했다
중학생이 되어 교과목과 시험이 본격적으로 어려워지기 시작하자 낙서장이 아닌 진지한 스케치북을 사들고 다니며 디자인을 해보려고 노력한 시기도 있었다 이왕이면 더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에 인터넷으로 다양한 일러스트를 참고하거나 만화책 작법서를 훑어보기도 했다 그런데도 예전처럼 자유롭게 막 그리고 상상하는 즐거움은 조금씩 줄어드는 듯했다 이젠 선을 그을 때도 이건 비례가 맞는지 색상은 어울리는지 고민을 하게 되고 배경을 그릴 때도 구도를 따져보느라 순수하게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원 수업 중간 쉬는 시간이나 집에서 음악을 들을 때 무심결에 손이 가는 대로 그리는 낙서는 여전히 즐거웠다
무엇보다 예전 낙서장 속 캐릭터들은 한없이 순수했고 온전히 어린 시절의 감성과 상상력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교과서적 지식이나 미학적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재미와 호기심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때로는 중학생 시절을 지나면서 잊고 있었던 그 순수함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교에 진학하면 더욱더 규칙과 기준에 얽매이고 우수한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그렇게 되면 낙서장 속에서 펼쳐졌던 무한한 이야기들은 점점 우리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말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어른이 되고 나서 오랜만에 집 안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던 낙서장을 꺼내보면 뜻밖의 설렘과 함께 나도 이런 상상을 했었나 싶어 놀라게 된다 그때 내가 그려놓은 캐릭터들과 그 주변의 작은 배경들은 비록 어설프긴 해도 당시의 마음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하나의 기록물 같다 때로는 우스운 그림체에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지만 그 캐릭터들을 통해 그 시절 나는 참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진다 그래서 어른이 된 뒤에도 가끔 그런 자유로운 낙서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마음 가는 대로 손을 움직여보면 어쩌면 잠시 동안이나마 동심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낙서장 속 캐릭터 이야기는 누군가에게는 하찮아 보일 수 있다 어차피 어린아이가 그린 서툰 그림이고 어른이 되면 쓸모가 없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각자의 상상력이 여과 없이 표현된 흔적이 녹아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예술적 표현이자 자기만의 세계관이다 이렇게 축적된 창작의 경험은 나중에 다른 형태의 예술이나 취미활동 혹은 단순히 일상생활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좋은 기반이 되어준다 상상력을 펼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기도 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관점을 기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른이 된 후에도 어린 시절 낙서장의 추억을 되새기며 때때로 낙서를 즐겨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아울러 그 시절에 즐겨보던 만화책 애니메이션 그리고 간간이 접하던 어린이용 게임들도 상상력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 당시에는 온라인 환경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어도 친구의 집에 있는 컴퓨터나 동네 PC방을 통해 이것저것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때로는 낙서장에 게임 속 캐릭터를 따라 그리는 재미를 누렸고 때로는 내 마음대로 오리지널 캐릭터를 만들어 게임 속에 넣어보는 상상을 했다 만약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 자라났다면 더 많은 자료를 쉽게 찾아보고 더욱 다채로운 캐릭터를 구상할 수도 있었겠다 싶다 다만 어딘가 부족했던 환경이 오히려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하게 한 촉매제였을지도 모른다
주변에 보면 지금까지도 어릴 적 그리던 캐릭터를 발전시켜 만화를 취미로 그리는 사람도 있고 실제로 만화가나 일러스트레이터의 길을 걷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어린 시절 낙서장에 담아둔 열정을 잃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며 캐릭터를 확장시켰다 그 결과 거창한 예술학교를 졸업하지 않아도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감성을 가진 창작물을 내놓는 경우가 있다 반면 오랜 시간이 흘러 그 시절 취향과 상상력이 바뀌긴 했어도 여전히 낙서하듯 편안하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그림을 전업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때때로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고 단편 만화를 구상하며 그때의 두근거림을 느끼려고 한다
캐릭터를 그릴 때 중요한 것은 디테일한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마음인 것 같다 물론 어느 정도 손재주가 있고 색채 감각이 뛰어나면 표현의 폭이 넓어지겠지만 가장 본질적인 것은 이 캐릭터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를 상상하는 능력이다 굳이 완벽한 선을 그릴 필요는 없다 살짝 비틀어진 선에서도 재미있는 느낌이 나올 수 있고 의도치 않게 번진 색칠에서도 우연한 예술적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때로는 실수처럼 떨어진 물감 자국이 캐릭터의 배경이 되는 혹성이나 신비한 오브젝트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계획에 없던 우연과 실수를 수용하면서 점점 더 다채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 바로 낙서의 매력이다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 낙서장 이야기와 다시 마주할 때는 혼자서 웃음을 짓게 된다 수줍고 서툴렀던 시절의 흔적이지만 그런 기억 덕에 나의 상상력이 형성되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은 그 시절의 열정과 자유를 되살리기 위해 여행 중에도 간단한 수첩과 펜을 챙겨 다니며 스치는 풍경이나 떠오르는 장면을 대충 그려본다 낙서에는 주제나 형식이 따로 없으니 무엇이든 그때그때 느낌대로 그릴 수 있다 이렇게 흘러나오는 상상력의 조각을 담아두면 언젠가 문득 이야기가 이어지고 배경이 확장되며 하나의 작품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낙서장 속 인물을 기반으로 글을 쓰고 소설을 완성하기도 하니까 낙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하나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디지털 환경이 발달한 요즘에는 낙서도 간단한 태블릿이나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처럼 종이 위에 연필을 꾹꾹 눌러 가며 지우개 가루를 날릴 필요 없이 손가락이나 펜으로 간편하게 선을 그린다 그 결과물을 저장하고 수정하는 것도 편리하다 이렇게 손쉽게 바뀐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 낙서장의 감성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종이 위에 직접 그리는 아날로그 특유의 감각이나 향수는 부족할지 몰라도 대신 더 많은 색상과 브러시를 써볼 수 있고 쉽게 되돌리거나 레이어를 분리해 작업할 수도 있다 그래서 디지털 낙서를 통해 또 다른 형태의 캐릭터가 탄생하는 모습을 보며 마치 그 시절 낙서장에 갇혀 있던 상상력이 가상 공간에서 넓게 뻗어나가는 듯한 느낌도 든다
어린 시절에 비해 세상은 훨씬 더 빨리 돌아가고 정보는 넘쳐난다 원하는 그림을 그리는 법을 알려주는 영상이나 자료를 몇 분 만에 찾아볼 수 있고 다양한 작가들의 일러스트나 만화를 쉽게 감상할 수 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SNS에 자신의 그림과 이야기를 올리며 반응을 얻는다 어쩌면 이런 시대에 다시 태어난다면 내가 낙서했던 캐릭터들도 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발전할 기회를 얻었을 것 같아 그럴 때마다 조금 부러운 마음도 들지만 동시에 그 시절의 나에게는 지금처럼 많은 정보가 없었기에 스스로 상상하고 창작하는 과정이 더 특별하게 기억되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 각자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시절 만들었던 캐릭터는 낙서장 속에 조용히 잠들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완전히 잊힌 것은 아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 안에 잠재된 동심을 꺼내보고 싶은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낙서장 한 권이 주는 설렘과 가슴 두근거림은 단지 어릴 때의 놀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지닌 창의력과 자유로움을 증명하는 소중한 증거물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절의 마법을 다시 펼쳐 볼까 하는 마음이 들 때 우리가 굳이 복잡한 준비물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메모장 하나 펜 하나면 충분하다
옛날 친구들이랑 함께 낙서하면서 놀던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자연스레 그 시절 유행했던 단순한 게임도 생각나곤 한다 물론 요즘 기준으로 보면 그래픽이나 조작감이 많이 부족했지만 그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특히 가끔은 슈게임 사이트 같은 곳에서 캐릭터를 꾸미고 새로운 스토리를 상상하곤 했는데 낙서장에 그 게임 속 아이디어를 고스란히 옮겨오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매체에서 얻는 자극이 낙서와 결합하면 더욱 풍부한 이야기가 탄생했으며 때론 친구들과 대화거리도 많아졌다
이처럼 어린 시절 낙서장에 깃든 무수한 캐릭터와 이야기들은 오늘날 우리의 감성과 창조적 취향을 형성하는 씨앗 같은 존재였다 서투른 손놀림과 뭉뚝한 색연필 자국을 통해 우리는 상상을 현실로 그려보는 기쁨과 해방감을 배웠다 종이 한 장에 펼쳐진 낙서가 단지 낙서에 그치지 않고 마음속 모험의 전부이자 창작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는 그 시절의 잔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고 때론 무의식중에 다시금 그 추억을 동경하고 찾고자 한다
우리 모두가 가진 저마다의 낙서장 속 캐릭터 이야기는 사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중하게 간직할 만한 보물과도 같다 한 번쯤 여유를 내서 서랍이나 박스 속 깊은 곳에 묻어둔 낙서장을 다시 열어보고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유치해 보이는 그림을 마주해보자 그 작은 손자국과 삐뚤빼뚤한 선에 담긴 자유로운 세계는 분명 지금의 나에게도 신선한 영감을 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열정 어린 시절의 용기 그리고 아무런 걱정 없이 마음껏 상상했던 그 시절의 에너지가 우리에게 다시금 살아 숨 쉬는 순간을 선물해줄 것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종종 힘든 일이 있거나 새로운 발상이 필요할 때면 나는 망설임 없이 연필을 들고 무작정 낙서를 시작해본다 처음에는 의미 없는 선을 긋다가 어느새 익숙한 동물이 되어 있고 그 옆에는 알록달록 옷을 입은 인물이 나타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인물에게 대사를 부여하고 배경을 만들어주다 보면 다시금 유년 시절 낙서장 속 자유가 떠오른다 학교 수업 시절 지루한 순간을 견디게 해주었던 낙서의 힘과 친구들이 서로 자랑하던 엉뚱한 세계관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왠지 마음이 가벼워지는 동시에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낙서 속 인물이 주는 활력은 마치 어릴 적의 나 자신이 등 뒤에서 응원해주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나는 낙서야말로 자신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믿는다 어린 시절의 그림이든 지금의 자유로운 스케치든 종이 위에는 생각과 감정이 필터 없이 그대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그린 선에 담긴 이야기를 되짚어보면 내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바람이나 갈망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러니 굳이 전문가처럼 잘 그릴 필요도 없고 잘못된 구도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낙서를 통해 내가 즐거움을 느끼고 새로운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느냐다
언젠가 어른이 된 나의 아이들이나 조카들에게도 이런 낙서 습관을 전해주고 싶다 비록 디지털 시대가 되어 가는 도중이지만 아날로그적인 낙서의 맛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손으로 직접 그린 그림은 손떨림이나 압력에 따라 결과물이 매번 달라지고 작은 실수 하나가 또 다른 창의적 모양이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작은 수첩에 낙서를 모으면서 그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붙이고 캐릭터에 감정을 실어보는 과정을 즐길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 그렇게 탄생한 캐릭터들이 비록 프로 작가의 작품처럼 완성도가 높지 않을지라도 분명 그들만의 특별한 기억이 될 것이고 훗날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줄 추억이 될 것이다
결국 어린 시절 낙서장에 숨은 상상력으로 그려낸 캐릭터 이야기는 우리 삶의 토대가 되어 준다 어른이 되어서도 가슴 한 켠에 남아 있는 순수한 열정과 창의력을 부르짖을 수 있게 해주는 문이다 어쩌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그 원동력이야말로 바로 어린 시절 낙서장 속에서 자란 캐릭터들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얼마만큼 더 시대가 바뀌고 삶의 양상이 복잡해지든 간에 가끔씩 그 낙서장을 다시 펼쳐볼 때면 반드시 어린 마음으로 되돌아가 상상력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조금은 설익고 너무나 천진해 보여도 그게 바로 우리가 지닌 가장 순수한 창조의 힘이니까 마음속 낙서장과 그 캐릭터들은 언제까지나 우리를 지켜보며 새로운 이야기를 함께 써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